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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Culture

[서평] 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

 



 

어떤 물건을 잘 팔기 위해서 중요한 몇가지를 생각해보면 딱 떠오르는건 제품의 품질과 서비스, 가격등 일 것입니다. 그 외에 부가적인 선호하는 연령층이나 빈돗수등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물건의 판매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기보다 물건의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물건이 팔리는 직접적인 이유에서는 제외 될 수 있습니다. 제품의 이름이나 타이틀 또한 그랬습니다. 제품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이지만 때론 가장 먼저 짓기도하고, 때론 다 만들어진 후 지어지기도 하는 것이 이름이고, 타이틀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타이틀' 이 제품을 판매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책을 예로 들어 서점에 가봐도 내가 보고 싶었던 책이 아니라 둘러보는 중에 손에 들리는 책들을 보면 눈을 사로잡는 제목이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들에 손이 가게 됩니다.

 

처음 '공자 왈 vs 예수 가라사대' 를 봤을때 그랬습니다. 유교와 기독교를 대표하는 성인의 이름과 그 말씀을 뜻하는 '왈(曰), 가라사대' 를 크게 제목에 놓고 가운데 대결구도를 뜻하는 'vs'로 장식해 놓으니 한번쯤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 이 책은 제목 처럼  두 성인의 말씀 구도를 놓고 'Fight' 시켜 승자를 가리는 내용일까요?

 

'Good' 이라는 '좋음'

 

'~왈(曰), ~가라사대' 라는 말은 '말씀하시되, 가르침이 될 말씀을 해주시되'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옛날 옛날에' 로 시작되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르침을 주는 말씀' 이라는 뜻으로 현재 진행형이라고 봐야 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좋다' 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래를 봐도 그렇고, 책이나 그림을 봐도 그렇습니다. 이유는 '사상' 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책의 제목으로 쓰인 'vs' 의 대결구도가 굳이 틀린 것도 아니네요. 사상적으로 얼마나 다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고, 서로 비교해 볼만큼 학식이 깊지 않았는데 어렵지 않게 서로의 사상을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호기심과 기대를 갖고 책장을 열었습니다.

 

서문에서 밝히는 이 책을 쓴 이유

 

작가는 책을 시작하기 전 서문에서 제가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답을 주고 시작합니다. 제목을 대결구도처럼 써놔서 자기도 우려가 되었는지 책을 쓴 이유는 두 성인의 말씀 중 누구의 말씀이 더 좋고 우위에 있느냐를 가리고자 함이 아니라 상호 교류하고 보완하는 관계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이 부분은 마무리에서 한번 더 언급됩니다.)

 

사실 종교나 사상을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워낙에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인 신앙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 한번 생각해야 할 부분이 그렇습니다.

공자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인간의 도(道)' 에 초점을 맞춘 사상이지 종교가 아니고, 예수의 말씀은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리를 말하고 있지만 현세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하늘나라에 맞춰져 있는 종교입니다.

사상과 종교의 만남이라고 보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러니 시작부터 맞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둘을 하나로 합친다.' 는 전체적 개념에서 출발하는 동양의 사유방식과 '하나를 둘로 나눈다.' 는 분석적 개념에서 출발하는 서양의 사유방식은 애초부터 출발점이 다릅니다.

 

이는 작은 문화적 차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젓가락 문화를 사용하는 동양은 종합적 사유방식으로 자연과의 합일을 주장하여 인문 정신을 발전 시켰고, 인도 문화와 아랍,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는 손가락은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강조하고 변증법적 사유방식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종교로 발전되었고, 포크와 나이프로 대표되는 서양 문화는 분석적, 논리적 사유방식을 형성하여 자연과의 분리를 이끌어내어 자연과학과 과학정신을 발전시켰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적 차이는 이런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그 뿌리가 깊고, 계속 자라나고 각각 발전하여 하나의 큰 나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 세 문화가 융합하고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초반에 언급하는 '하동하서론(세계 문화의 중심은 30년 동안 서양으로 흘렀다가 다시 30년 동안 동양으로 흐른다.)' 은 이제 동서양 문화의 전환점으로 그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옮겨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서로의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화합하고 받아 들여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펼치고 있습니다.

 

사실 공자의 말씀들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중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고 작가도 그 점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책이라는 점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상적인 측면을 놓고 두 말씀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출발점과 해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죄설에 따른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는 죄에서 죄로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속죄함을 받고,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성선설과 사람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서 출발하여 사람은 본시 인성이 선하기 때문에 자신을 억제함으로써 보편적인 인애를 실천할 수 있다는 유교 사상은 서로 다른 해법을 주장합니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속을 얻지만, 유학은 극기로써 예를 회복하면 대동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 스스로 쓴 것 처럼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서로 다른 목적지를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을, 공자는 대동사회 실현을. 한쪽은 현세가 아닌 '하늘나라' 라는 이상향으로 향하는데 목적을 두고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을 말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현세에서 이상향을 추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부분에 맞춰져 있기에 서로의 사상에서 필연적으로 같을 수 밖에 없으나, 다른 과정을 내포할 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장이 있으니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 즉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억지로 시키지 말아야한다.' 라는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성경의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대접하라.' 와 같은 맹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 말을 자주 언급합니다. 각 사상을 현대 사회와 접목시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단순히 호기심의 관점에서 읽기 시작했던 처음과는 달리 꽤 진지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중립을 유지하려는 자세 때문이였습니다. 사실 그리 중립적이진 않습니다. 읽다보면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매끄럽지만, 예수의 이야기에는 많은 부분에 의문점을 드러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유학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작가의 글이니 어찌보면 당연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럼 논의할 가치가 없겠다며 뿌리칠 이유도 없는 것은 두 사상가(작가는 예수도 사상가라고 생각하는 듯)의 말씀들은 몇세기 전이나 현대에나 미래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칠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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