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Culture

[영화] 롱폴링 - 무지한 그녀의 나락

보이스레시피 2012. 11. 1. 11:08
 

롱 폴링 (2011)  Où va la nuit The Long Falling 

 

 

프랑스 | 드라마 | 2012.10.25 | 청소년관람불가 | 105분

감독 마르탱 프로보스트

출연 욜랭드 모로, 피에르 무어, 에디스 스콥, 얀 하머넥커

 

 

여느 가을과는 달리 요즘 극장가에는 기대되는 작품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미 시사회를 통해 많은 영화를 미리 봐둔 영향도 있겠지만, 액션은 지나치게 액션 위주로, 코미디는 지나치게 웃기는 것 위주로 집중하다보니 영화 장르에 따라 내용이 극대화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더 잔인하게, 더 시끄럽게, 더 웃기게 되다보니 영양소 균형이 고르게 잡힌 식사가 사라져버린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극장가에 "비지터"나 "엔딩 노트", "롱 폴링"의 개봉예정 소식은 그야말로 듣던 중 반가운 일이었는데요, 자극적인 스토리나 영상이 아니라 영화의 본질로 돌아가 스토리텔링에 충실하다는 평가에 더욱 더 기대하게 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셋 중 두 번째로 시사회에 참여한 영화 "롱 폴링"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무지가 유죄가 되다

 

 

영화 "롱 폴링"은 여러모로 동시개봉작인 "용의자X"와 스토리적인 면에서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여주인공은 자신의 남편(혹은 전남편)을 살해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천천히 무너져내리게 됩니다. 그녀들이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불구, 이들의 결혼생활은 전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속에 이루어졌기에 관객들은 여주인공을 동정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도 그녀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그녀를 나락에서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돕기 시작하고, 살인자와 피해자라는 상반된 개념 속 영화는 모호한 윤리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하지만 "롱 폴링"의 로즈가 "용의자X"의 백화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살고 싶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정당방위로 전남편을 살해한 백화선과는 달리 로즈의 상황은 어떤 절대 절명의 위기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남편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도망치로 숨어살던 백화선에 비해 로즈의 경우 남편의 폭언과 폭력에도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역시 대조적입니다.
반면 "용의자X"의 전남편도 "롱 폴링"의 남편도 전형적인 "악한"의 모습입니다. 두 사람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참, 그래도 싸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리고 절대 권력을 과시했던 두 남자는 결국 자신이 경멸하던 두 여자에게 살해당하면서 그녀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것 역시 비슷합니다. 하지만 유사한 운명을 나눈 두 남자와는 달리 두 여자의 인생은 극명하게 갈리게 되죠.

여러모로 로즈의 범행은 계획적인 것이 분명했지만, 범행 이후 그녀는 별로 계획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피해갈 법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협하는 행동을 한다던가, 형사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마치 걷는 것도 서투른 아이가 길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뛰어노는 것을 보는 듯 조마조마할 것입니다. "용의자X"의 백화선이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반면, 로즈는 "너무나도 허술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함정으로 몰아가는 것이죠. 그녀의 유아적인 "순수함"은 결국 그녀를 폭로해버립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들 토마스는 오열합니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어차피 조금만 더 있으면 술 퍼먹다가 알아서 죽었을 것을!"

비인간적이었던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어머니를 살인자로만 몰아세우는 토마스의 행동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지만, 관객으로써 그녀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왜, 어째서 그런 식으로 죽여야만 했는지. 지금까지 참아온 모든 세월이 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는데 왜 그런 리스크를 안고 살인을 저질렀는지 말입니다.
아들 토마스에게 어머니 로즈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감독은 로즈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지한 여성인지를 그려냅니다. 그녀의 순수함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때묻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녀의 무지로 인해 그 순수함마저 빛이 바래고 결국은 끔찍한 범죄자로서 인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되는 순간입니다.

소름끼치도록 무력한 현실, 그리고 자아의 말소
 

 

어머니를 학대하고 자신마저 위협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토마스가 게이가 된 것은 단순한 영화적 설정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가 후천적인 성향이 아니며 태어날 때부터 유전학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어린 시절 비뚤어진 부모와의 관계와 올바르지 못한 성 정체성의 정립으로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 정론이기 때문입니다. 즉, 토마스가 "정상적인" 삶을 찾지 못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보이는 빈센트와 함께 동거한다는 설정 자체가 그가 어렸을 때부터 겪어온 학대의 결과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머니의 무능력함을 동정하면서도 경멸하는 그 자신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와 빈센트의 관계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다시 재현되고 있습니다. 어머니 앞에서는 독립적이고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애인 빈센트에 있어서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의존적이며 유아적인 행동을 보이곤 합니다.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생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빈센트에게 "묻어가는" 상황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사소한 말에 이상행동을 보이며 어줍잖게 빈센트와 결별을 한 것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끊기 위해 남편을 살해한 로즈의 행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세상을 인지하고, 성숙한 어른으로서 상황을 해석하지 못하는 모자의 서투른 선택들은 이 영화의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열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인상깊었던 것은 바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불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분명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키는대로 학대했고, 오랜 세월동안 그녀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죽는 그 순간 그는 누구보다도 무력했으며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면 평생을 피해자로서 살아온 로즈는 남편을 살해하는 순간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살해한 후에도 별로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를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엄청난 사건 이후에도 무뚝뚝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갈 길을 가는 그녀에게 있어 남편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야 혹은 죽였어야 하는 인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로즈는 어째서 그 오랜 세월동안 남편의 학대를 참고 견딘 것일까요? 토마스의 말처럼 남편을 떠나버렸으면 되는 일인데,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국 살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를 통해 로즈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이유를 말합니다. 그 첫째는 "토마스 때문에". 하지만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학대와 집안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토마스는 16살이라는 어린 나이게 집을 나갑니다. 즉, 토마스가 부모의 보호를 떠나 자립한 뒤 약 1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굳이 그 때문에 남편의 학대를 견딜 이유는 없다는 것이죠.  
그녀의 두 번째 이유, "남편은 혼자 살지 못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답변에서 로즈는 자신이 이미 모든 자아를 상실한 상태임을 고백합니다. 보통 정상의 인간은 어떠한 관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Give & Take 를 통해 그 관계를 판단하고 파악하기 마련인데, 로즈에게는 Give만 있을 뿐 Take의 권리가 말소되었기 때문이죠. 로즈의 답은 얼핏 들으면 무한한 사랑과 희생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무능력한 한 사람의 안타까운 무지일 뿐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사랑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관계개선의 여지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아무런 저항도,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휘둘릴 뿐입니다.
남편을 살해하고 도망길에 오른 그녀의 행보 역시 전혀 주도적이지 않습니다.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타인의 의지 외에는 단순히 '잡히고 싶지 않아'라는 일차원적인 욕구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생각하기는 커녕 그 때 그 때 머릿속에 생각나는 대로 (혹은 타인이 말하는 대로) 어떻게 할지 결정합니다. 이런 그녀의 순수하기까지 한 유아적 행동들이 그녀를 "불쌍하고 안타까운 가해자"이자 "답답하고 무지한 피해자"로 정의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의외이자 긍정적인 인물은 바로 여관 주인인 탈보 부인입니다. 정신없는 로즈를 거두어 친절하게 위로해주고 간호해주는 것은 물론, 물심양면으로 그녀의 도주를 도와주는 탈보 부인의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째서 저렇게까지 도와주는걸까?" 궁금하게 합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로즈와는 달리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고 안타깝게도 배우자를 먼저 보내야 했던 것인데도, 학대받는 로즈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의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상상하고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입니다만, 탈보 부인은 놀즈 형사와 함께 불쌍한 로즈를 도와줍니다. 괴로운 로즈의 인생에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아들 토마스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이 증오했던 아버지지만 살인을 저지른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내치는데 말입니다.

"...사랑하기 어렵겠지만 사랑해 줄래"
 

 

세자르 상 7개 부문을 휩쓴 "세라핀"의 주역들이 다시 만난 "롱 폴링" 역시 섬세하고 극적인 연기와 연출이 돋보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마지막 줄에 앉은 모자른 사람을 위해 세 번은 말해야 한다"던 히치콕 감독의 신념과는 달리, 영화는 극적인 내용에도 불구 너무나 평온하게 흘러갑니다. 죽고 죽이며, 쫓고 쫓기는 급박한 상황이지만 다른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긴장감으로 관객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극중 템포를 맞추어가며 로즈가 겪게 되는 지루하리만치 긴 나락의 여정을 차분하게 그려냅니다.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떨어져가는 그녀의 마지막까지.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받고 싶어. 남들처럼 사랑받으며 살고 싶어."
무뚝뚝한 얼굴 뒤의 로즈는 그녀가 영화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과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남편을 떠나지 않은 것도, 아들을 그렇게 보낸 것도, 그리고 결국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찾아간 것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찾던 그녀의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욕망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모르고 길을 잃어버린 것이 그녀 일생의 가장 큰 실수이지 않았을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의 무지가 답답하고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동정하며 그녀의 느린 침몰을 안타까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 혹은 갓 결혼한 후, 남을 사랑하고 남에게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가 알 수 있었다면.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면. 그녀는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학대를 견디며 괴롭게 살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가정폭력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가정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둔하지만 불쌍한 피해자 로즈. 혹은 불쌍하지만 아둔한 피해자 로즈.
이 두 수식어는 그녀와 마지막까지 동행합니다. 안타깝고 괴로운 인생을 살았지만, 그녀의 아들조차 쉽사리 상처입은 그녀를 껴안고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미 서로가 오랜 시간 피해자로써 살아왔기 때문에 비뚤어져버린 사랑의 표현을 바로잡기 어려운 것이죠.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하기 힘들기 때문에 같은 상처를 안고 있어도 서로 보듬어주기 힘들 뿐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것을 알아. 하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해주겠어?"

로즈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아가 있어 한 번만이라도 아들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과연 결말은 달라졌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살해함으로써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남편의 죽음과 함께 그녀 자신 역시 이미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미 너무 늦었을 때였습니다.
영화 속 로즈의 마지막 표정에서 감독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어린아이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그녀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묘한 눈빛은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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