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한국
97분
2012년 3월 15일 개봉
(시사회: 2012년 3월 13일, 광화문 스폰지하우스)
감독: 전수일
음악: 강산에
청소년 관람불가
흔히 말하는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일반 관중이 꺼리는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함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한국의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었기에, 이번 “핑크” 시사회에 참여하면서 기대 반 두려움(?) 반,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연배우 서갑숙씨는 이미 자전적 성고백서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로 더 잘 알려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혼의 아픔을 겪은 그녀가 11년만에 다시 스크린관으로 복귀하는 영화라는 점과, 영화 “핑크”가 내재하고 있는 “고독”이라는 논제의 관계는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결코 정상적으로 볼 수 없는 극중 “옥련”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영화는 비가 퍼붓던 어느 날 수진이 한 섬마을의 선술집 “핑크”로 일자리를 찾으러 오면서 시작됩니다. 자폐아 아들 “상국”과 함께 살고 있는 “옥련”은 또다시 벌거벗을 채로 뛰어나가 온몸이 흙범벅이 된 상국을 정성스럽게 닦아주며 그녀를 맞이했고, 수진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미동없이 무반응으로 일관합니다.
사실 영화 핑크의 전반적 상황이 이렇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며, 만약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분명 놀라거나, 싫어하거나, 좋아하거나, 기뻐하거나, 분노할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핑크의 주인공들은 결코 “평범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통상적 영화의 소통방식에 익숙해져있는 관객 중 하나였던 저는 그로 인해 스크린에서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 영화 속 현실이 아닌 초현실/비현실적 환상으로 느껴지더군요. 어떠한 사건과 그에 따른 주인공들의 리액션이 연계되어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의 전개와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혹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때로는 배우들에게서 카메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배우들의 대사가 일부만 작게 들려오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 때 역시 관객들은 가끔 알아들을 수 있는 대사의 파편과 저 멀리 보이는 배우들의 제스쳐 또한 그동안의 스토리의 진행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관객들에게 특별히 친절하지 않은 영화의 전개 방식은 영화 전체에 걸쳐 계속됩니다. 일단 영화가 애초부터 기승전결의 진행을 거부하고, 캐릭터를 파악하기에는 주인공들의 대사가 너무 적은데다가, 때때로 배우들은 카메라를 조금 빗겨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지만, 다른 통상적인 소통기법과는 달리 그 응시 대상을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사실 “소외되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 그들이 고독을 극복하고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영화의 카피문구를 보면, 영화의 진행은 아마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습니다. 억척스럽게 홀로 자폐아인 아들을 키우는 옥련과, 친아버지로부터 무수히 성폭행을 다해 심신이 망가진 수진이 만나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결국은 서로 위로하며 따뜻한 우정과 사랑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 정도일까요? 하지만 영화에서의 내용은 극히 다릅니다. 옥련은 자신의 가게를 봐주는 명목으로 경찰관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만, 재개발 반대로 시위를 벌이다가 결국은 구속되어 잡혀갑니다. 설상가상으로 엄마를 만나러왔다 실망한 상국은 경찰관에게 시비를 걸고 도망치다가 냉장고 안에 스스로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수진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결국은 병원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핑크의 새 여주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고독을 극복하였고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나갔다는 이야기일까요?
여러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각 캐릭터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있는 의식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핑크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이 각각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전제 하에 이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자아의 방어 과정 (Defensive Processes) 이 아니었을까요?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이 방어 과정이 성격 방어에서 전환, 환상을 거쳐 결국 꿈에 이른다고 주장했으며, 이 방어 과정을 통해 자아가 분열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자폐아인 상국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어 매사에 무반응으로 대처합니다. 새로 온 수진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그녀를 무시해버리고 대꾸도 하지 않죠. 그에게는 아무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분명 자신의 주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반응합니다. 옥련의 가슴을 성큼 무는 과정에서도, 경찰차에게 화풀이를 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나죠. 즉, 자신의 실제 지각 능력과는 관계 없이 자신을 방어하여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폐아라고 하지만, 덩치와는 달리 아직도 어머니의 가슴을 탐하고, 성숙한 여인이 전라로 접근해왔을 때도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누구에게든 의지하려 손을 내미는 상국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유아적 욕구”를 형상화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아이었을 때라면 용납될 수 있지만, 조금만 커버리면 더이상 수용할 수 없는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상국이 (이러한 유아적 욕구의 실체로서) 누릴 수 있는 결말은 어쩌면 이미 정해져 있었던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유아적 욕구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혹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배우고) 마음 속 한 구석에 가두어 질식시키게 되니까요. 영화에서의 상국 역시 해변에 방치된 (예전 그가 갈매기가 태어나는 곳이라고 믿어왔던, 즉 어머니의 자궁같은 의미를 가진) 냉장고에 갇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후에 재개발이 이루어진 어촌의 파노라마를 보여줄 때 등장하는 냉장고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여전히 냉장고에 갇혀있는 상국을 다시한번 암시합니다.
나아가 수진은 조금 더 큰 (적어도 영화에서 소개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죠. 그녀 역시 처음에는 그녀의 비밀을 지켜나가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신을 끊임없이 쫓아오며 추행하는 아버지의 혼령으로 분열됩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학대를 한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큰 심리적 압박이 되었으며, 수진은 이러한 압박을 아버지의 환상으로 스스로 전환시킨 것이죠 (실제로 수진이 핑크에서 일하고 있었을 당시 수진의 아버지는 계속 투병하며 병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의 실체를 죽인 뒤 과연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를 얻었느냐의 여부입니다. 영화에서는 그녀가 그 후에도 아버지의 환상에 시달렸는지 알려주고 있지 않지만,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불행의 씨앗이자 괴로움의 전부였던 아버지를 죽인 뒤 역시 조금도 행복해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옥련은 초반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과는 달리, 구속된 이후로 단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영화에서 “소실되어” 버립니다. 영화 속 옥련의 캐릭터는 참 애매모호한데, 영화 전반에 걸쳐 그녀가 어째서 그토록 열심히 재개발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녀와 함께 반대시위를 버리는 마을 사람들이 “돈을 줘봐야 다른 곳에서 정착할 만큼도 아니고, 정말 줄지도 모르는 일” 이라며 동기를 설명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정작 그녀의 동기는 불분명합니다. 선술집과 자폐아인 아들까지 뒤로 밀어두고 시위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사명감이 엿보이지만… 또한 그녀는 이미 폐가가 되어버린 동네의 다른 집들도 돌보아줍니다. 이만 포기하라는 경찰관 애인의 말에도 “헛소리 하지마. 나는 이 동네를 절대 못떠나”란 말로 일축해버립니다. 이러한 정황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녀는 생존의 문제로 재개발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동네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동네에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그녀의 이상 혹은 꿈을 위해 그녀는 기꺼이 소실되며, 결국 그녀의 행방에 대해 영화조차 침묵합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 무색하지 않도록 영화에서는 적나라한 성교 장면과 전라 장면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장면이 다수 등장합니다. 다 큰 아들이 어머니의 젖을 게걸스럽게 탐한다던가, 길거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방뇨하는 장면 혹은 수진이 만들어낸 환상 속 아버지가 전라로 수진을 기다리는 모습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코 문화화 혹은 사회화 될 수 없는 고독과 자연으로의 회기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화”라는 베일을 벗긴 인간의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각 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관점은, 앞서 설명한 대로, 세명의 주인공이 각각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자아의 한부분”을 표상하므로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한 한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인공들의 캐릭터, 내면 그리고 반응들이 베일에 싸여져 읽기 어려운 만큼, 그 내면의 세계를 구체화 시켜주는 음악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가수 강산에씨가 직접 방랑자로 나와 영화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on-music) 을 제외하고는 BGM (Background music) 으로는 짧은 두세곡 정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79분의 러닝타임과 지극히 적은 대사 그리고 정적인 장면이 많은 것에 대비해서 상당히 적은 양입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이 두세곡의 짧은 BGM은 “난해하고 해석이 필요한” 영화의 줄거리와는 상반되게 긍정적이며 정스럽습니다. 마치 암울하고 답답한 이야기를 해주다가 “그런데 다 잘될거야~”라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느낌처럼, 즐겁고 여유로운 휴가를 연상시키는 음악은 옥련의, 수진의, 상국의 고독과 고통도 결국은 이길 수 있는 작은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리뷰를 쓰면서도 아직 대답할 수 없는 참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극 중 방랑자는 무슨 역할일까?
그는 어째서 핑크에 계속해 출연하는 것일까?
옥련과 수진이 (욕실이 아닌) 방 안에서 물수건으로 몸을 닦는 의미는 무엇인가?
수진은 바다에서 정말 자살을 기도한 것일까?
아무래도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영화를 만든 사람들 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런 의문점을 나름대로 해석해나가면서 “자신만의 핑크 interpretation” 을 만들어가는 것 또한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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