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홍수 – 멸망의 끝에서 외치는 사랑
처음 “홍수”를 받았을 때의 인상: 여성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그전까지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라는 사실과 핑크색 그라데이션 디자인의 두툼한 책, 그리고 뒷면에 친절하게 쓰여진 문구 “세상이 사라져도 사랑은 남는다” – 종합해보자면 아마도, 희망이 모두 사라져버린 세계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인공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새로운 소망을 시작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선입견 때문에 첫 장이 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다른 때와는 달리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몇번 읽기를 반복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이 소설이 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마거릿 애트우드의 작품세계나 “디스토피아 소설”의 의미를 미리 알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더라면 이러한 반전은 없었을텐데요!
700쪽에 달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사실, 첫 1/3은 작가와 씨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트우드는 마치, 그녀의 문학관과 서술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해서 독자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듯, 설명과 묘사를 극히 아끼고 있는 듯 했습니다. 애초부터 별도의 설명 없이 아담1, 신의 정원사, 물 없는 홍수 등의 새로운 개념들이 쏟아져 나오는 초반부는 마치 작가를 상대로 (혹은 그의 진술을 토대로) 나름 추리하며 이해해가야 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답답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홍수”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긴장감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애트우드는 어떠한 “의문” 혹은 “궁금증”을 유발시킨 후에 그것을 더 궁금하게 하여 애간장을 태운다거나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 자체를 계산하지 못한 것처럼 그녀의 페이스대로 이야기해 나갑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작가가 “키스톤 (key stone)” 처럼 제시한 논제가 더이상 발전되나가지 않게 되면 의아해지기 마련입니다. 분명 이어질 것 같은 내용인데도 한동안 “방치”되어 그 인과관계나 연계성마저 모호해지게 되죠. 이것은 마치 우리의 실제 삶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를 들어, 어떤 수상한 사람이 나와 만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거나) 전개가 아닌 그저 의미 있는 일과 의미 없는 일들이 차별없이 연속되며 이어져나가는 시간. 어쩌면 그것이 비현실적인 “홍수”에서의 인류멸망을 더욱 더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가 종말로 치닫고 있을 때, 세상에는 여러 극단적 종파들이 생겨납니다. 애트우드가 서술하는 이런 광신교 집단의 대부분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녀가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홍수에 등장하는 광신교 집단의 행동들이 기존의 극단적 종교집단들의 행위와 일치하는 점이 많지만, 그들의 이념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외부인들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거나, 단체 내의 새로운 법과 강령을 만들어 강요하는 것에서는 세간에 알려진 일부 사이비 종교 단체의 성향과 비슷합니다만,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사자양을 만든다던가 (p.151. 이것은 이사야 11장 6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를 염두에 둔 발상인 것 같습니다. 사자양을 만들어낸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름 역시 “사자 이사야파” 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완벽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추진합니다. 이 “완벽한” 인간들은 마치 감정을 배제한 순한 초식동물처럼 서술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세계의 멸망은 이 인간들의 유전자를 창조해내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홍수”를 읽으면서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애트우드의 풍부하고 구체적인 상상력이었습니다. 모든 소설의 작가들이 그렇지만, 그들이 소설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의 세계와 세계관을 창조해낼 때에 그 세계가 얼마나 신빙성있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작가의 역량이 판단되기도 합니다. 애트우드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 소설을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인류에게 어떠한 경고를 보내고 있기 보다는,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홍수”의 인류의 멸망이, 세계의 종말이 더욱 더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뉴욕 타임즈”의 “아무것도 예언하지 않지만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이라는 평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세계를 창조하고 메세지를 넣은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직접 본 세계를 담담하게 증언하는 듯한 그녀의 문체는 오히려 예언서라기보다는 계시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수”에서 애트우드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애틋하고 따뜻한 개념의 “사랑”과는 차이를 보입니다. 홍수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쉽게 말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멸망이 가까워져오면서 세상은 끔찍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더이상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않으며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집니다. 단지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에” 강자는 약자를 약탈할 수 있고, 그가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고통공 감옥의) 어떤 팀들은 자신들이 죽인 대상을 나무에 걸어 놓았고 다른 팀들은 사체를 훼손했다. 머리를 잘라 내고 심장과 신장을 꺼냈다. 상대 팀을 위협하기 위한 행위였다. 음식이 모자라거나 그저 자신이 얼마나 비열한 인간인지 보여주기 위해 신체 일부를 먹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 경계선을 넘는 것뿐만 아니라 경계선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다고 토비는 생각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상관없이 그런 짓을 하게 된다” (p. 158)
수퍼바이러스가 전세계에 퍼지면서 사람들은 좀비처럼 녹아들어갔고, 그들 중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의 마지막 모습 – 주변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생각하는 마음 – 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의 식량을 약탈하던 돼지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난 뒤 죄책감을 느끼는 토비나 친구 아만다를 구하기 위해 부상당한 몸으로도 기꺼이 적진으로 들어가는 렌은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홍수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윤리적 요소입니다. 또한 토비를 돌보아주고 걱정해주는 레베카, 어릴적 친구를 위해 위험을 무릎쓰는 섀키와 크로제 역시 마찬가지죠. 반면 토비에게는 어머니같았던 필라는 살아남지 못하는데, 수퍼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고 스스로 죽음을 택합니다. 렌을 돌보아주었던 모디스 역시 그녀를 지키는 과정에서 고통공 탈옥수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해 생을 마감합니다.
상반되는 모습은 절대적 선의 역할을 맡았던 아담1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이상주의자로서 신의 정원사를 이끄는 사람이었고, 결정적으로 토비를 죽음으로부터 구합니다. 또한 실용주의자였던 잽과는 달리 그는 이념을 중요시하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이었고,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신의 정원사의 리더로서, 혹은 멸망 앞에 놓인 인류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물 없는 홍수” 가 일어나기 얼마 전 신의 정원사들이 거주하던 “에덴절벽”은 함락되고 그들은 순식간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도피 중에도 아담1은 매 장마다 연사를 계속하는데, 평화주의자였던 그의 모습은 점점 자신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한 자기합리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길에 멜린다, 대런, 퀼, 이 세 동반자를 기쁘게 환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은총, 즉 신의 정신을 발휘하는 겁니다. 그들은 신의 섭리로 인해 격리될 수 있었기에 기적적으로 물 없는 홍수를 모면했습니다.” (p. 572)
“아울러, 여행길에서 우리는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런과 퀼은 질병에 굴복했는데 그들이 보인 초기 증상에 대해 우리는 크게 우려했습니다. 그들의 부탁 아래 우리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들이 보여 준 배려는 칭찬할 만한 것이었고 우리는 그들의 희생정신에 감사드립니다.
멜리사가 그토록 뒤처지도록 내버려 둔 것은 어쩌면 착오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생 개 떼를 통해 그녀는 동료 동물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고 신의 위대한 섭리를 따라 단백질 대순환의 일부가 됐습니다.” (p. 627)
이러한 아담1의 변화는 그가 “인간의 타락은 다차원적이다”라고 정의한 것 (p.295) 과 연계되는 것 같습니다. 앞서 그는 필라의 죽음을 왜곡하면서 토비에게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어. 하지만 그건 더 큰 대의명분을 위해서란다” (p. 289) 고 말하면서 그의 이런 변질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아담1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결국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담1의 마지막 연사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한 때 머물던 에덴절벽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마지막에 렌 일행을 향해 온 무리들은 아닐 것입니다). 토비는 마지막으로 신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우리같은 사람들을 남겨놓은 것이냐고. “홍수” 세계의 신은 결국 대답하지 않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그들이 “사랑을 간직한 자들이기 때문”이라면 결국 세계의 멸망 후에는, 사랑이라는 본질을 간직한 만신창이의 인간들과 감정을 배제한 튼튼한 조작된 인간들이 양분화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겠죠. 소설의 마지막 주인공 일행을 향해 노래하며 다가오는 무리가 어떤 사람들일지 알 수 없지만 (사실, 그것이 진정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죽음에 가까이 다다른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환상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토비와 렌 일행은 멸망해버린 지구에서 노아의 가족들처럼 다시금 인류의 번성을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진짜 인간들 가운데서 일어날지, 아니면 새로운 만들어진 인류와 합쳐질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애트우드는 이 소설이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으로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홍수” 는 사색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고 하는데, speculative 라는 단어에는 사색, 공론 등의 뜻이 있습니다. 인류의 멸망이 유전자 조작과 성욕의 충족을 추구하다 벌어진 일이라는 이론을 생각해볼 때, 애트우드가 생각했던 “최고악”은 아마도 성(sex)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홍수”에서는 금전적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성을 사고 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홍수”는 그 두께만큼이나 난해한 부분이 많아,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라면 애트우드가 묘사한 사물, 서술 하나 하나에 개별적 해설과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과연 아담이나 이브가 “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아담은 어떤 신을 향해서 기도하고 경배하는 것인지, 그들에게 순교자는 어떤 의미인지 등등… 하지만 애트우드 자신은 끝까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은 결국 독자의 몫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홍수를 읽는 내내 가슴 한편이 답답하고 불편해지는 것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홍수”에 등장하는 반인류적인 행위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기 떄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심사만을 추구하고 싫증났거나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잔인하게 제거해버리는 블랑코의 모습에서도, 신도들에게는 철저히 외부문화를 금지하면서도 자신들은 비밀리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아담과 이브들의 모습에서도, 그것들과 우리 사회와의 평행성이 느껴질 때마다 “홍수”는 더욱 더 사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죠.
이 난해하고도 거대한 소설을 결국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수”를 대단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장편 소설을 치밀하고도 훌륭하게 이끌어나가는 애트우드의 능력 때문일 것입니다. 기발한 신조어와 합성어에서도, 탄탄한 세계관과 설정에서도 그녀는 그녀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 듯 보입니다. “홍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녀의 소설 “인간 종말 리포트” 를 거쳐와야 한다니, 여러 궁금증과 의문들은 “인간 종말 리포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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